중학생 때 외할머니댁 책꽂이에 꽂힌 이 책을 보고 홀린듯 읽었다. 외할머니댁은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시골이었고, 어쩌면 이 책의 배경과 비슷한 곳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중학생이 읽기에는 다소 어려운 내용이었는데 무슨 재미가 있었던 것인지 이 책을 집에 가지고 와서 며칠에 걸쳐 읽었다. 그 당시 내가 완독한 책 중에 가장 두껍고 어려운 책이었다. 이렇게 두꺼운 책을 다 읽었다는 뿌듯함과 책에서 주는 감동과 여운이 깊어서 아직도 나에게 가장 인상깊었던 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대지]라고 이야기 한다.
대지는 펄 벅(Pearl S. Buck)이 1931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배경은 중국이고 왕룽이라는 한 농부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가난한 농부였던 왕룽의 결혼을 시작으로 3대(왕룽-왕후-왕옌)에 걸친 가족의 이야기이다. 1부는 왕룽의 결혼부터 시작한 [대지]이고, 2부는 왕룽이 죽은 후 세 아들의 이야기를 그린 [아들들]이며, 3부는 왕룽의 손자들을 중심으로 한 [분열된 집안] 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장대한 서사 속에서 내게 가장 인상깊었던 인물은 왕룽의 아내 오란(O-lan)이다. 오란은 말수는 적지만 존재감은 크고, 늘 그늘 속에 있었지만 가족을 지탱한 기둥 같은 인물이다. 오란은 말보다 행동으로, 권리보다 책임으로 삶을 살아낸 여성이었다. 본래 황제의 집안에서 하녀로 일했던 오란은 팔리듯 왕룽에게 시집오지만,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불만들 드러내지 않는다. 오란은 논밭을 일구고, 아이를 낳고, 전쟁 같은 삶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오란은 가뭄과 기근으로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구걸도 마다하지 않고, 도둑질도 서슴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가족을 살리겠다는 절박한 의지였다.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가족이 기근을 피해 남쪽으로 피신했을 때이다. 왕룽은 방향을 잃고 절망에 빠지지만, 오란은 그 와중에도 아이들을 돌보고, 길거리에서 돈과 음식을 얻기 위해 나선다. 그러다 왕궁에서 훔친 보석을 몰래 간직하게 되는데, 그것이 훗날 가정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자본이 된다. 그렇게 오란은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가장 현실적이고 냉철하게 판단하며 삶을 해쳐나가는 존재였던 것이다. 가난을 딛고 왕룽이 부자가 되었을 때, 오란의 삶은 역설적으로 더 깊은 그늘로 들어간다. 남편은 그녀의 수고를 잊고, 그녀의 외모를 부끄러워하며, 더 젊고 화려한 여인을 탐한다. 오란은 이 변화에 대해 소리 높여 항의하지 않는다.
오란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그저 입술을 깨물었다.
오란의 침묵은 단순한 복종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현실에 대한 체념이자, 동시에 내면의 품위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침묵 속에서 서서히 쇠약해지고, 결국 병든 몸으로 죽음을 맞는다. 그녀가 삶에서 받은 보상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의 존재를 내세우지 않았다. 그녀가 병들고 죽음을 맞이할 때, 왕룽은 오랜 침묵 끝에 비로소 그녀의 무게를 느낀다.
그녀는 말이 없었으나, 그녀 없이는 지금의 나도 없었다.
왕룽이 그녀의 죽음 앞에서 비로소 눈물을 흘리며 오란의 가치를 깨닫는 장면은, 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의 삶을 얼마나 늦게 이해하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사랑도, 존경도 생전에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대지는 그런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란이라는 인물은 그러한 질문 자체를 던지게 만드는 존재로 남는다.
오란은 고전적인 여성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를 단순히 '희생적인 여성'으로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어떤 목소리도 허용되지 않는 자리에서 자신의 생존을 지혜롭게 구축해 나간다. 침묵은 약함이 아니라 때로는 저항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 침묵 속에는 삶을 바라보는 냉철한 시선과, 사랑을 실천하는 고요한 힘이 있다. 우리는 종종 화려한 삶에 시선을 빼앗긴다. 하지만 오란처럼 조용히 중심을 지키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삶을 만들어낸다.
펄 벅(Pear S. Buck)dl 1931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당시 서구 사회가 거의 알지 못했던 중국 농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녀는 1932년 퓰리처상과 1938년 미국 여성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펄 벅은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중국어를 모국어처럼 익혔고, 그 땅에서 사람들과 호흡하며 살아왔다. 이처럼 [대지]는 작가의 문화적 이중성, 경계인으로서의 시선을 바탕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그녀는 중국인을 대상화하지 않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두려움, 소망과 몰락을 공감 어린 시선으로 그려냈다. 펄 벅은 낯선 땅의 침묵을 귀 기울여 들은 작가였고, [대지]는 그녀가 그려낸 가장 인간적인 진실의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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