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나와 마주하게 해준 책, 신경숙의 [외딴방]
스물넷, 첫 직장을 얻었다. 갑작스러운 취직으로 방 구할 새도 없었던 나는 노량진 고시원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회사인 여의도와 가깝기도 하고, 교사 임용시험을 준비하며 들어본 노량진이라는 동네가 그나마 가장 친숙해서 그쪽으로 가게 되었다. 낡은 원룸의 방 안은 늘 쥐죽은 듯 조용했다. 그 방에 들어서면, 하루 종일 참고 버틴 감정들이 고요히 밀려왔다. 가끔은 그 조용함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게 느껴졌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야 했다. 그 무렵,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책 한 권. 제목이 눈에 밟혔다. 『외딴방』. 그 단어가 그 당시의 나를 말해주는 것 같아서, 주저 없이 집어 들었다.
신경숙 작가의 『외딴방』은 열여섯 살의 소녀가 전북 정읍에서 서울로 올라와 봉제공장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산업소설이나 시대 회고의 성격을 넘어서, 그것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한 인간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이야기였다.
공장에서 돌아와 외딴방에 누워 있으면 하루가 고스란히 몸에 남아 있었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오래도록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피곤한 몸을 끌고 퇴근해 좁은 방바닥에 누웠을 때 느껴졌던 기운 빠진 감정,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무기력과 고단함이 문장 속에서 되살아났다. 그때의 나는 책 속 ‘나’만큼 어린 나이도 아니었고, 노동의 강도도 다를 수 있었지만, 외로움의 형태는 닮아 있었다. 침묵 속에서 자신을 붙잡기 위해 애쓰던 감정이 너무 비슷해서, 조금은 놀랐다.
기억은 늘 앞서 걷는다. 그리고 나는 뒤쫓아 걷는다. 그래서 기억은 점점 흐려지고, 나는 점점 선명해진다.
읽을수록 이상하게도 위로보다는 공감이, 공감보다는 자꾸만 내 안의 오래된 풍경이 떠올랐다.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시절을 떠올릴수록 지금의 나를 더 또렷하게 비추었다. 과거를 따라가며 현재를 되짚는 방식. 책은 그런 식으로 나를 끌고 갔다.
책 속 ‘나’는 공장 일에 지쳐 있으면서도 짬을 내 책을 읽고, 노트에 글을 쓴다.
책 속에서 단어를 외우고, 그 단어를 써보며, 나는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아내고 있다고 믿었다.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나 역시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 후 작은 스탠드 불빛 아래 앉아 아무 목적 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쓰던 시간.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나 자신을 조금이라도 붙잡기 위해 하루의 마지막을 그렇게 보냈다. 어떤 날은 너무 피곤해서 한 줄도 못 쓰고 잠들기도 했지만, 마음은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작가의 글을 읽으며, 그 시간들이 단지 나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처음 알게 됐다.
나는 자주 외딴방에서 나 자신과 이야기했다. 아무도 듣지 못하게.
혼자 살던 방 안에서 나도 같은 시간을 보냈다. 작은 방, 작은 창, 조용한 밤. 세상과 단절된 그 시간에, 나는 자주 나 자신과 조용히 대화했다. 때로는 참기 힘든 외로움에 휩싸였지만, 그 안에서 묵묵히 나를 돌보는 법을 배웠다. 책 속의 ‘외딴방’은 단지 공간이 아니라, 마음속 어딘가에 있는 방처럼 느껴졌다.
지금 나는 마흔을 넘겼고, 혼자가 아니다. 함께 웃고 함께 사는 가족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끔 그 시절의 방이 그리워진다. 어둡고 춥고 외로웠던 공간. 그러나 동시에 가장 내면 가까이에 있었던 시간. 그 방에서 처음 나 자신을 또렷이 마주했던 기억.
『외딴방』은 내게 성장소설 이상의 의미로 남아 있다. 나를 위로해주었다기보다, 조용히 나의 시간을 옆에서 지켜봐준 책. 말없이 등을 토닥이는 사람처럼, 과하지 않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를 놓치지 않게 해줬다.
책장 한 켠에는 지금도 그 시절 읽었던 『외딴방』이 꽂혀 있다. 낡고 빛바랜 표지, 군데군데 접힌 페이지. 가끔 꺼내 다시 읽는다. 그리고 매번 그 안에서, 오래전 내 모습을 다시 만난다. 고요하고, 조용하지만 강인했던 그 시절의 나. 작가가 썼던 마지막 문장을 나도 따라 중얼거려본다.
나는 그때 외딴방에 있었다. 하지만 그 방에서 나 자신을 처음 만났다.
나의 외딴방도 그러했다. 외로웠지만 텅 비진 않았고, 아팠지만 소중했다. 지금도 그 방을 기억하며, 오늘의 내가 조금은 덜 흔들릴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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