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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 감상문

by EYAEYAO 2025.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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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고뇌와 자아 탐구의 기록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는 20세기 초 독일 문학의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덴마크 출신의 젊은 작가 지망생 말테 라우리스 브리게가 파리에서 겪는 내면의 고독과 불안, 그리고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작가는 1875년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나 유년 시설부터 섬세하고 예민한 성정을 지녔고, 이러한 개인적 경험과 사유가 작품 전반에 걸쳐 녹아 있다. 

 

파리의 거리에서 시작된 일기

[말테의 수기]는 전통적인 소설 형식의 서사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주인공 말테는 덴마크 귀족 출신의 젊은 시인으로, 프랑스 파리에 체류하며 삶의 단면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다. 이야기에는 기승전결이 없다. 대신 파리라는 도시의 인상, 과거의 기억, 타인의 삶, 존재와 죽음에 대한 단상이 번갈아 등장한다. 이 일기는 서사의 형태가 아니라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며, 말테의 불안정한 내년을 드러낸다. 

말테는 파리의 거리와 건물,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며 자신의 내면과 외부 세계 사이의 간극을 경험한다. 파리는 그에게 영감을 주는 동시에, 압도적인 고독감과 불안감을 안겨주는 공간으로 다가온다. 말테는 도시의 번잡함 속에서 오히려 더욱 깊은 외로움을 느끼고, 주변의 모든 것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듯한 환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경험을 한다. 그는 파리의 병원, 거리의 풍경, 낡은 건물들을 통해 죽음과 소멸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한다. 그의 시선은 도시에 대한 이질감과 불안을 반영한다. 그는 일기의 서두에 이렇게 적는다.

"나는 배운다. 매일, 밤에, 고통 속에서 배운다. 나는 배우고 있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이는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긴장감을 요약한다. '시는 삶의 총체적 체험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태도는 단순한 예술론을 넘어 말테가 마주하는 삶 그 자체에 대한 인식이다. 파리의 고독한 생활은 말테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진짜 삶이고, 어떤 경험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사람들은 모두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가고 있을 뿐이었다."

죽음과 존재에 대한 탐구

말테의 사유는 현재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자주 과거로 돌아간다. 유년 시절의 저택, 병약했던 아버지, 병상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 조부모의 모습들이 파편처럼 소환된다. 이 회상 장면들은 종종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흐리며 전개된다. 말테는 조용한 죽음을 동경하지만, 파리에서 목격한 죽음은 그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거리에서 보게 된 한 노파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 여자는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혼자서 조용히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죽음은 그녀의 입에서 비명을 질렀다."

 

이는 말테가 죽음을 단순한 종말이 아닌, 삶의 도 다른 단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죽음은 고통스럽고, 예기치 않으며, 개인의 품위를 허락하지 않는다. 동시에 말테는 그 안에서 인간 존재의 실체를 본다. 죽음은 거대한 철학이 아니라, 곁에서 일어나는 작고 잔인한 사건이다. 죽음은 삶의 한 부분이자 완성이고, 각자의 죽음은 고유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 모두 각자의 죽음을 가지고 태어난다."

 

죽음은 단순한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본질적인 부분이고 따라서 시인이 직면해야 할 대상이다. 릴케는 죽음을 삶과 동등한 무게로 그려냄으로써, 말테가 삶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킨다.

 

시를 쓴다는 것, 살아낸다는 것

[말테의 수기]는 말테가 어떻게 시인이 되어가는지를 기록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시인이 될 수 없음을 매일 확인하면서도, 그럼에도 시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기록이다. 그는 시를 쓰기 위해 모든 것을 경험하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지나치게 복잡하고 감당하기 어렵다. 인간의 얼굴, 병, 가난, 죽음, 광기. 이 모든 것이 그의 일기 속에 등장한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누구도 죽을 수 없고, 아무도 살아 있지 않다.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를 흉내 내고 있을 뿐이다."

 

말테가 이 문장을 남기는 시점에서 그는 이미 '진짜' 삶의 결핍을 절감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의 삶이 그에게는 모조품처럼 보인다. 감정도, 관계도, 죽음조차도 진짜가 아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결국 거짓 속에서 진실을 갈구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 릴케는 [말테의 수기]를 통해 '시인이 된다는 것'은 언어를 통해 감각과 경험을 재구성하는 일이 아니라, 세계의 비가시적인 부분과 맞닿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 경험은 통증과도 같고, 그 결과로 나오는 문장은 차라리 절규에 가깝다. 말테의 수기는 한 개인이 시인이 되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말테의 수기]는 읽는 이를 환대하지 않는다. 파편적인 구조, 자의적인 회상, 무거운 주제는 독자로 하여금 책장을 쉽게 넘기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그 불친절함 속에서 삶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한 사람의 기록을 목격하게 된다. 이 책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존재에 대한 고백이고, 동시에 시에 대한 고집스러운 믿음이다. 말테가 일기 속에 남긴 문장들은 결국 나에게 되묻는다. 당신은 지금, 진짜로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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