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동배우기 : 학교에서 실패하기를 통해
윌리스가 1977년 영국 버밍엄 시의 한 학교에서 진행한 현장 연구는 현재까지 사회학 연구의 고전으로 남아있다. 윌리스가 던진 연구 질문은 문화 재생산이 어떻게 일어나는가이다. 윌리스는 이 질문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표현했다. "어떻게 노동자의 자녀가 노동자가 되는가?" 흔히 노동자 계급의 자녀나 다문화 가정 청소년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자신이 보수와 평판이 좋은 직업을 가질 만큼 똑똑하지 않다고 깨닫게 된다고들 말한다. 즉 학교에서 처지는 경험을 통해 자신의 '열등함'을 깨닫고, 전망이 덜 좋은 직업을 택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윌리스의 지적에 따르면 이러한 해석은 사람들의 실제 삶과 다르다. 가난한 이웃들이 가진 '거리의 지혜'는 공부를 잘하는 것과는 멀 수 있으나,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만큼 정교하고 복잡하다. 학교를 떠나는 아이 중 '난 너무 멍청해서 공장에서 하루 종일 상자나 정리하는 것이 당연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자라 온 환경이 좋지 않은 아이가 단순 노동을 하면서도 자신을 실패자로 여기지 않는 데는 분명 다른 요인이 있다.
윌리스는 버밍엄 학교에서 한 무리의 남자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이들을 관찰했다. 그 학교에는 서인도와 아시아 배경을 가진 아이들도 있었지만, 이 그룹의 일원들은 모두 백인이었으며 자신들을 '사나이들'이라고 불렀다. 윌리스는 이들이 학교가 지니는 권위적 구조를 훤하게 꿰고 있었으나, 이를 권위에 협력하는데 써먹기보다는 반항하는데 활용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나이'들은 학교를 하나의 낯선 환경으로 보면서도, 자신들의 목적에 맞춰 요리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보았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갈등을 일켰다. 교사들과 승강이를 벌이며 쾌감을 얻었고, 교사가 권위를 부릴 때의 약점과 교사도 상처받기 쉬운 개인일 뿐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가령 교실에서 교사는 아이들이 조용히 앉아 자기 할 일을 할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이 남자아이들은 교사가 쳐다볼 때만 잠시 멈출 뿐 계속 움직이고 떠들며 반항한다. 이 남자아이들은 직장 생활도 학교와 비슷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일하는 날만을 고대한다. 일하면서 만족감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임금을 받는 것에 대한 기대는 매우 크다. 이들은 타자 치는 일, 카펫 까는 일, 배관, 도색 등 자신들이 했던 일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기보다는, 학교에 대한 태도와 비슷하게 경멸적인 우월감을 갖고 있다. 일하면서 얻어지는 어른이라는 지위를 즐기지만, 경력을 쌓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윌리스는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형성되는 태도나 환경이, 학교에서 사나이들이 만들어 낸 반학교 문화와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예컨 필요한 경우 농담이나 재치로 권위를 지닌 사람들의 요구를 무시하는 것이다.
학교의 규범과 훈육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면서 이 아이들이 만들어 낸 하위문화는 그들이 앞으로 종사하게 될 것으로 보이는 직업의 작업 현장 문화를 그대로 반영한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나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노동이 얼마나 고되고, 평가 절하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가정이 생길 때쯤이나, 비로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 교육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을 자녀에게 전달하려고 해도 자신 역시 그랬듯이 아이들은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다. 문화 재생산 과정을 밝히고 불평등이 교육 체제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증명하는 데 윌리스의 연구가 성공한 셈이다.
이 연구가 그렇게나 지대한 영향력을 가졌던 주요 이유 중 하나는 경험적 연구이면서도 이론적으로 충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초점은 백인 노동자 계급 남자아이들에게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이 연구를 다른 사회계급 성원이나 여자아이 또는 백인이 아닌 민족 집단의 경험으로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2. 성별 차이의 재생산
1970년까지도 젠더는 교육 사회학에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며, 여자아이들의 경험에 관한 연구는 굉장히 제한되어 있었다. 범죄와 일탈 연구를 비롯한 대부분의 다른 사회학적 주제들에 여성적 관점이 부족했듯이, 교육 사회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에 여성주의 이론적 관점에서 사회학자들은 여자아이들이 학교생활을 하면서 여성성의 규범에 맞춰 사회화되는 과정을 탐구했으며, 이들 연구는 학교가 계급에 상관없이 체계적으로 여자아이들을 불리하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안젤라 백로비와 수 리스는 영국의 학교 교육이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바람직한' 여성 규범이 재생산되도록 돕는다고 주장했다. 학교는 여자아이들은 가정생활과 그 책임에 충실하게, 남자아이들은 미래의 노동자로 준비시키는 것을 자신들의 업무로 여기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학교는 사회에 고착된 전통적인 성 고정관념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미셸 스탠워스는 남녀 합반 아이들의 교실에서의 경험을 연구한 끝에, 학교가 동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려고 함에도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보다 교사의 주목을 덜 받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다. 스탠워스는 이런 교사들이 여자아이들이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게 하며, 이들의 성취 수준을 떨어뜨리는 데 이바지한다고 결론 내린다. 이는 자기 충족적 예언으로, 남자 아이들이 여자 아이들보다 더 잘할 것이라는 교사의 기대가 학생을 대하는 교사의 행동을 형성하고, 교사의 성별 편향적 태도 탓에 애초의 틀린 예언이 사실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학교 문화에는 이성 간의 성차별이 널리 퍼져 있으며, 특히 운동장이나 복도, 그 외 교실 밖의 다른 공간들에서 그렇다. 윌리스도 발견했듯이, 남자 아이들은 성차별적인 언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며 여자 아이들을 언급할 때 모욕적인 말을 쓴다. 이는 여성을 비하하는 공격적인 남성성이 만연한 분위기를 만드는 한편, 남자 아이들에게 허용되는 정체성을 매우 편협하고 남자 다운 범위로 국한한다. 그 한 가지 결과로 동성애가 은폐된다. 게이나 레즈비언인 젊은이들은 학교 환경이 자기 안에서 발현되고 있는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표출하지 못하는 공간임을 깨닫는다. 만약 그들이 이를 표출한다면 놀림과 괴롭힘, 폭행의 대상이 되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여성주의 학자들은 학교 교과 과정의 내용도 조사했다. 예를 들어 호주의 사회학자 데일 스펜더는 많은 과목이 부지불식간에 저지르는 성차별 때문에 여자 아이들이 그 과목에 흥미를 잃게 된다고 보고했다. 가령 과학 교과서에는 당연하다는 듯 여성 과학자들의 업적을 싣지 않아, 학생들이 이들에 대해 전혀 모르도록 한다. 이런 식으로 과학은 여자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역할 모델을 제공하지 않으며, 여자 아이들이 과학 과목에 흥미를 갖는 것을 방해한다. 수 샤프는 학교가 여자 아이들에게 좀 더 '여성적인' 과목인 보건이나 예술을 고르게 함으로써 수학이나 정보 의사소통 기술 같은 좀 더 '남성적인' 과목에서 멀어지게 만든다고 보았다. 여자라는 이유로 혜택을 받지 못하고 배제되던 전통적인 패턴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여자 아이들과 젊은 여성들이 이제는 거의 모든 영역과 교육 수준에서 남자 아이들보다 더 나은 성과를 보인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는 남자 아이들이 '남성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는 논쟁을 촉발했다.
3. 교육, 문화 자본 '아비투스'의 형성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이론은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현재까지 문화 재생산에 관한 가장 체계적이고 일반적이 이론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는 경제적 위치와 사회적 지위, 상징 자본을 문화적 지식 및 기술과 연결 짓는 문화 재생산에 관한 폭넓은 이론을 고안해 냈다. 교육은 이 관점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다. 부르디외 이론이 교육 사회학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 자본의 형태에 관한 그의 이론을 살펴보자.
부르디외 이론의 핵심 개념은 마르크스에게서 취해 온 자본이다. 마르크스는 생산 수단의 소유 여부를 사회의 중요한 분절점으로 인식했으며, 자본가들이 생산 수단을 소유함으로써 노동자를 복종시킬 수 있는 우위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부르디외에게 이러한 경제적 자본은 단지 개인이나 사회 집단이 우위를 얻을 수 있는 여러 형태의 자본 중 하나일 뿐이었다. 부르디외는 경제적 자본뿐만 아니라 사회적 자본, 문화자본 및 상징자본을 주장했다. 사회적 자본은 엘리트 사회 연결망의 일원이 되거나 지위가 높고 영향력 있는 사회 집단에서 활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문화 자본은 가정환경이나 교육을 통해 얻어지는 것으로, 지식의 증가나 기술 수준 향상, 학위나 신임장 같은 각종 자격증 취득을 의미한다. 상징 자본은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 낮은 지위의 사람을 지배할 수 있게 해 주는 명망, 지위 그리고 여러 형태의 사회적 존경을 가리킨다.
이러한 도식에서 중요한 점은 자본은 서로 교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높은 수준의 문화 자본을 소유한 사람은 이를 경제적 자본으로 교환할 수 있다. 보수가 많은 일자리의 채용 면접에서 우월한 지식과 자격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지원자에 비해 우위에 설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높은 사회적 자본을 가진 사람은 '알맞은 사람을 알거나', '알맞은 사회 모임에 참여하는' 형태로 사회 자본을 상징자본으로 효과적로 교환하며 거래에서 자신의 권력 기회를 증가시킨다.
부르디외의 두 번째 개념은 장(Field)이다. 이는 경쟁적 투쟁이 일어나는 다양한 사회적 장소 혹은 무대다. 이러한 장을 통해 사회적 삶이 조직되고 권력관계가 작동한다. 각각의 장은 다른 장에서는 통용되지 않을 수도 있는 고유한 '게임의 규칙'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예술이나 미학의 장에서는 문화 자본이 가장 높은 가치를 지니며, 예술이나 음악같은 분야의 역사에 대해 조예가 깊은 사람이 그 장 안에서 더욱 권력 있는 사람이 된다. 이에 따라 문학이나 영화 비평가들은 비평을 통해 책이나 영화를 성공하게도 만들고 실패하게도 하는 권력을 가진다. 그러나 비평가들의 기준은 경제적 자본이 지배하는 생산의 장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부르디외는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아비투스는 몸에 각인된 행동거지,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과 같이 학습된 기질을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적 환경과 관련된 아비투스를 받아들인다. 아비투스의 예로는 번스타인의 언어 코드나 맥 언 게일의 연구에서 '마초' 남자아이들이 노동 계급의 남성성을 표출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아비투스라는 개념은 사회 구조와 개인의 행위 및 특성 사이의 연결 고리를 분석하도록 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부르디외는 문화 자본을 세 가지 형태로 정리했다. 문화 자본은 체화된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문화 자본은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고, 몸을 움직이는 방식에 흡착되어 있다. 또한 문화 자본은 예술 작품이나 책, 옷 같은 물질적 소지품에 객관화된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문화 자본은 국가적으로 승인되고 노동 시장에서 손쉽게 경제적 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는 자격증같이 제도화된 형태로도 발견된다. 교육을 통해 체화되고, 제도화된 문화 자본이 어떻게 사회적 삶의 특정한 장에서 사용되는 자원을 만들어 내는지 관찰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런 점에서 교육은 많은 사람에게 잠재적으로 혜택을 주는 문화 자본의 비옥한 토양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번스타인과 윌리스 그리고 게일이 간파했듯이, 교육 제도는 더 은 범위의 사회와 분리된 중립적인 장이 아니다. 교육 제도 내의 문화와 기준은 그 사회를 반영하며, 학교는 이미 가정과 사회 연결망에서 문화 자본을 획득한 이들에게 체계적으로 혜택을 부여한다. 중산층 어린이는 학교 문화에 쉽게 적응한다. 이들은 정확하게 말하고, 올바른 예절을 지니며, 시험을 더 잘 친다. 교육 제도는 재능이 있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라고 묘사되고, 이것이 기정사실로 널리 받아들여짐에 따라 노동자 계급 어린이는 자신들이 지성적으로 열등하며 실패의 원인이 시스템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고 받아들인다. 이러한 점에서 교육 제도는 사회 불평등을 문화적으로 재생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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