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20세기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자 부조리극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연극의 문법을 거부하고,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부조리와 무의미함을 탐구한다. 두 방랑자가 실체 없는 '고도'를 기다리는 단순한 설정 속에서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1. 끝없는 기다림의 반복
연극은 황량한 시골길, 앙상한 나무 한 그루 옆에서 시작된다. 두 방랑자 블라디미르(디디)와 에스트라공(고고)은 이곳에서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린다. 그들은 고도가 누구인지, 왜 기다리는지, 심지어 이곳이 약속 장소가 맞는지조차 명확히 알지 못한다. 그저 막연히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다.
<1막>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를 기다리는 동안 끊임없이 대화하고, 때로는 다투고, 때로는 서로를 위로한다. 그들은 신발을 벗었다 신었다 하거나, 모자를 만지작거리는 등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중 폭군 같은 주인 포조와 그의 노예 럭키가 등장한다. 포조는 럭키를 짐승처럼 다루며 끌고 다니고, 럭키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포조의 명령에 따라 춤을 추고 생각 없는 말을 쏟아낸다. 포조와 럭키가 떠난 후, 고도의 전령이라고 밝히는 한 소년이 나타나 고도가 오늘은 오지 않고 내일 올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실망하지만 내일을 기약하며 그 자리에 머무른다.
<2막> 다음 날, 1막과 거의 동일한 상황이 반복된다. 나무에는 전날 없던 잎사귀 몇 개가 돋아나 있지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상황은 변함이 없다. 그들은 어제의 일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며, 다시 고도를 기다린다. 이때 포조와 럭키가 다시 등장하는데, 1막과는 달리 포조는 장님이 되어있고 럭키는 벙어리가 되어 있다.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포조는 럭키에게 의지하며 절규한다. 이들의 변화는 시간이 흘렀음을 앞시하지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기다림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다시 소년이 나타나 고도가 오늘은 오지 않고 내일 올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떠나자고 말하지만, 결국 그 자리에 멈춰 서며 연극은 끝난다.
2. 부조리극의 정수
'고도를 기다리며'는 전통적인 극의 요소인 명확한 줄거리, 인과관계, 성격 변화 등을 의도적으로 배제한다. 대신,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부조리함과 무의미함을 극대화하여 보여준다.
가장 중요한 상징은 바로 '고도'이다. 고도는 연극 내내 등장하지 않으며, 그의 정체나 존재 여부조차 불분명하다. 그는 두 방랑자를 끊임없이 기다리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삶을 이어가게 하는 유일한 동기가 된다. 고도는 구원, 희망, 삶의 의미, 죽음 등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결국 아무것도 아닌 '실체 없는 기다림' 그 자체를 상징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대화와 행동은 무의미함의 반복이다. 그들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끊임없이 말을 하고 행동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아무런 의미도 생산하지 못한다. 이는 인간이 삶 속에서 겪는 무의미한 반복과 허무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이 대사는 연극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 중 하나이다. 인간은 무언가를 기다리며 살아가지만, 그 기다림의 대상이 무엇이든 결국 삶의 본질적인 무의미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포조와 럭키는 인간 사회의 권력 관계와 존재의 변화를 상징한다. 1막에서 포조는 지배자, 럭키는 피지배자였지만, 2막에서는 포조가 장님이 되고 럭키가 벙어리가 되면서 그들의 관계는 역전되거나 혹은 더욱 의존적인 형태로 변한다. 이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취약하고, 관계가 얼마나 가변적인지를 보여주는 장치이다.
"가자"
"못 가."
"왜 못 가?"
"고도를 기다려야 하니까."
이 대화는 인간은 자유롭게 떠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고도'라는 존재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3. 질문을 던지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관객에게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며 살아가는가? 그 기다림은 진정 의미 있는가? 삶은 결국 무의미한 반복에 불과한가?
이 연극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난해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난해함 속에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통찰력이 숨어 있다. 연극은 우리에게 삶의 목적과 의미를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숙제를 던져준다. 고도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모습은, 어쩌면 희망 없는 현실 속에서도 작은 희망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단순히 비극적이거나 절망적이지 않다. 그 속에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해학이 있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삶을 버텨내는 연대감이 존재한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의 보편적인 고뇌를 다루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는 강력한 작품이다.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리뷰] 알베르 카뮈 - 이방인 (0) | 2025.06.25 |
---|---|
[북리뷰] 톨스토이 - 이반 일리치의 죽음 (0) | 2025.06.24 |
[북리뷰] 톨스토이 - 안나 카레리나 (1) | 2025.06.23 |
[북리뷰] 괴테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3) | 2025.06.20 |
[북리뷰] 밀란 쿤데라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3) | 2025.06.19 |